부여간첩단 검거된 공작원의 자서전기사및 인터뷰

대남공작원 김동식씨가 1995년 10월 부여에서 우리 군경(軍警)과 총격전 끝에 잡혔을 때 언론은 그에게 ‘신세대 공작원’이라는 별칭을 붙여줬다. 그의 체포는 월북자(越北者) 중심의 대남(對南) 직접 침투 공작이 북한에서 나고 자란 젊은 공작원을 육성해 남파(南派)하는 방식으로 바뀐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들 젊은 공작원들은 사상 좋고 성분 좋은 것은 물론이고 학업 성적과 운동신경 그리고 용모까지 고려해 고교(高校) 졸업생이나 대학 재학 중인 학생들 가운데서 선발한다고 한다. 김동식씨도 체포됐을 때 외모상으로는 북한에서 수년간 죽음을 넘나드는 특수 훈련을 받은 흔적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곱상했다.
 
 ‘신세대 공작원’ 김동식씨는 1990년 5월과 1995년 8월, 두 번 남파됐다. 처음 남파됐을 때 그는 당시 재일교포로 위장해 서울에 거점을 마련하고 암약하며 대남공작을 총지휘하고 있던 남파공작원 이선실과 현지에서 포섭한 H씨를 대동하고 월북하는 데 성공했다.
 
 1차 침투 때 또 다른 목표는 과거 통혁당, 인혁당 관련자의 가족을 찾는 한편 재야 운동권 인사들을 포섭해 지하망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1990년 5월 30일 제주도로 침투한 김동식씨는 그해 10월 18일까지 4개월20여 일간 남한에 머물며 지하당 조직(고정간첩망)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그 기간 동안 김동식씨의 공작조는 이선실과 함께 생활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김동식씨는 북으로 돌아간 후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
 
 1차 남파 후 5년여가 지난 후인 1995년 8월의 2차 남파에서는 남한 내의 고정간첩망 점검과 국내 운동권 인사들을 포섭해 지하망을 새롭게 구축하는 일이 주된 임무였다. 또 하나는 1980년대에 남파돼 스님으로 위장해 장기간 암약하고 있는 월북자 출신의 공작원 ‘봉화 1호’를 대동해 복귀하는 임무였다. 김동식씨는 이 ‘봉화 1호’ 대동 월북을 위해 접선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사전에 우리 기관에 정보가 유출돼 체포됐다.
 
 김동식씨는 체포된 후 남한에서 살며 학업을 계속해 최근에는 <북한의 대남혁명전략 전개와 변화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김동식이라는 이름은 남한에서 체포된 뒤 사용하는 가명(假名)이다. 그는 최근 북한에서의 공작원 선발과 훈련 과정, 북에 두고 온 가족 이야기, 두 차례에 걸친 남한 침투에서의 임무 등을 중심으로 자전적 고백록을 썼다. 그 책의 가제는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로 도서출판 ‘기파랑’에서 펴낼 예정이다.
 
 이 책에서 그는 그동안 밝히지 않았던 두 번째 침투 당시 부여받은 주요 임무에 대해 고백하고 있다. 유력 대선후보와 핫라인을 구축하라는 임무가 그것이다.
 
 《월간조선》은 김동식씨의 자전적 고백록이 출간되기 전 그 책에 수록될 일부 내용을 입수했다. 그 자전적 고백의 일부 내용을 소개한다. 이 책은 김동식씨 개인으로서는 아픔의 기록이지만 우리에게는 분단 상황의 적나라한 현실을 보여주는 현대사(現代史)의 중요한 기록이기도 하다. 김동식씨는 책 서문(序文) 말미에 자전적 고백록을 세상에 내놓기로 결심한 이유를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아울러 과거에 정치적인 이유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기도 하다.”
 
 
 ‘봉화 1호’를 대동해 복귀하라
 

이승환 당시 경찰청 차장이 1995년 10월 생포된 공작원 김동식씨에 대한 중간수사발표를 하고 있다.

 1995년 10월 24일, 그날은 하루 전에 내린 가을비로 땅이 촉촉이 젖어 있었고 겨울을 재촉하는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약간은 음산한 전형적인 늦가을 날씨였다. 보통 그런 날 사람들은 밖에 나다니는 것을 싫어한다. 김동식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럴 수가 없는 처지였다.
 
 며칠 전에 김동식은 무전을 통해 본부에 보고를 하고 방송을 통해 지시를 받았다. 북한에서 침투하기 전에 받은 임무, 즉 1980년 4월에 남파되어 스님으로 위장해 활동하고 있는 ‘봉화 1호’라는 공작대호를 가진 공작원을 접선해 대동 복귀하라는 것이었다. 공작대호는 공작조나 공작원들의 신상이 모두 보안사항이기 때문에 그들을 구분하기 위해 지은 닉네임, 즉 별명이다.
 
 본부에서 받은 임무를 수행하려면 ‘봉화 1호’가 있는 부여 정각사에 가서 그를 만나야 하는데 김동식은 왠지 그곳에 가기가 싫었다. 남파된 후 김동식은 사전에 그의 존재를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탐문해 봤지만 그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았다.
 
 김동식이 남파되기 전 파악한 바에 따르면 ‘봉화 1호’는 남한 출신이었다. 6·25 때 월북해 결혼한 후 7남매를 낳고 살다가 대남공작원으로 차출됐고 마지막 침투 시점인 1980년 이전에도 여러 차례 남한에 침투, 임무를 수행한 적이 있는 베테랑 공작원이었다. 당시 그는 남파돼 있는 상태에서 남자 공작원으로서는 유일하게 이선실처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었고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됐으며 아들딸들이 모두 좋은 대학을 나와 각 분야에서 중간급 간부로 활동하고 있었다.
 
 1980년 봄에 남파된 후, 같은 해 겨울에 그를 접선하려고 은밀히 침투하던 공작선이 영문도 모른 채 남한 해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격침되는 일이 발생했다. 사고 발생 후 대남공작 부서에서는 그의 피검(被檢) 및 전향 여부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후 그의 전향 가능성에 대한 논쟁은 15년간 계속됐는데, 그가 북한 공작부서와 무전과 방송 등 약정된 절차에 따라 지속적으로 연계연락을 취하고 있었고 부여된 임무도 수행했다고 보고했기 때문이다.
 
 1995년에 들어와 대외연락부에서는 그를 복귀시키기로 결정했다. 노동당 창건 50주년이 되는 1995년 10월 10일을 앞두고 김정일에게 선물할 공작성과에 목말라 하던 대외연락부에서 무리해서라도 그를 데려오기로 결정한 것이다. 대외연락부는 그 사실을 김정일에게 보고해 결재까지 받았다.
 
 김동식은 공작조의 조장으로서 조원 박광남과 함께 ‘봉화 1호’가 전향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나, 혹시 전향했을지도 모르는 위험 부담을 안고 그와 접선하기 위해 95년 10월 24일 그날 부여 정각사 부근으로 갔던 것이다.
 
 김동식은 찜찜한 기분이었지만 본부(북)의 지시를 어길 수는 없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접선을 약속한 장소로 갔다. 역시 ‘기분 나쁜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이미 경찰이 접선 장소 부근에 잠복해 있었던 것이다. 총격전이 벌어졌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김동식은 우리 군경이 쏜 총탄에 다리를 맞고 체포됐다. 총상을 입은 조원 박광남은 병원으로 후송 도중 사망했다. 95년 10월 24일, 이날은 김동식이 공작원 훈련 도중 받은 ‘가짜 남한화’의 길이 아닌 ‘진짜 남한화’의 길을 걷게 되는 첫날이었다.
 
 
 1차 침투
 
경찰 관계자들이 김동식씨의 진술에 따라 1995년 10월 25일 오후 성남시 분당구 중앙공원 내 묘지 망부석 옆에서 발견한 무전기와 난수표.

 그로부터 정확히 5년 전인 1990년 10월 24일. 북한 사람이었던 김동식에게 그날은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었다. 그날은 당시 북한 노동당 사회문화부(현재 대외연락부) 소속이었던 김동식에게 공화국 영웅 칭호 수여가 결정된 날이었다. 공화국 영웅 칭호는 북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고 싶어하는 영광과 존경의 상징이면서 누구나 받을 수 없는 선망과 희망의 상징이다.
 
 1차 침투 시 김동식이 수행한 임무, 즉 남한에서 자생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운동권 인사들을 포섭해 지하당 조직을 구축하고 이선실을 대동해 복귀에 성공한 대가로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은 것이다.
 
 김동식이 1차 침투 임무를 부여받은 때는 90년 4월경이다. 연락부 이창선 부부장은 다음과 같이 1차 임무를 설명했다.
 
 “공작조의 기본임무 첫 번째는, 10년 전에 남조선에 파견돼 활동하고 있는 ‘북악산(이선실의 공작대호)’을 접선해 대동 복귀하는 동시에 북악산이 포섭해 놓은 ‘백암산’(이선실이 포섭해 놓았다고 보고했지만 실제는 포섭에 실패한 학생운동권 출신 인사. 훗날 국회의원을 지냈다)을 접촉해 지하당 조직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임무는 남조선에 자생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운동권 인물들을 포섭해 지하당 조직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당시 담당 과장과 지도원은 포섭할 인물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침투 후 포섭할 운동권 인물들은 H씨와 K씨입니다. H씨는 강원도 정선 출신으로서 1980년 사북탄광 노동자 파업을 주동한 인물이며, K씨는 부산 출신으로서 1986년 서울대학교 ‘마르크스-레닌주의당 사건’ 관련자입니다. 공작조는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대표’, 즉 당대표 자격으로 활동할 것이며, 공작조의 대호는 ‘오성산’입니다. 공작조가 포섭한 새로운 대상에 대해서는 ‘대둔산’과 ‘비봉산’이라는 대호를 부여하면 되겠습니다.”
 
 김동식이 1차 침투 때 대동하고 복귀한 H씨에게 북한이 부여한 임무 가운데는 김정일 신화를 선전하라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이창선은 H씨에게 이런 지시를 했다고 한다.
 
 “지금 남조선 청년학생들과 인민들 속에서 친애하는 김정일 동지께서 배를 타고 인천을 통해 서울을 다녀갔다는 소문을 퍼뜨리시오. 이것이 곧 김정일 동지에 대한 위대성 선전이오. 그렇게 되면 김정일 동지를 따르는 남조선혁명가들과 인민들에게 신심과 용기를 줄 수 있으며 그들은 김정일 동지의 신출귀몰하신 모습에 더욱 감명받을 것이오. 이것은 정말 중요한 임무이니 황 선생이 다른 조직원들에게는 얘기하지 말고 특별히 비밀을 준수해서 꼭 수행하기 바라오.”
 
 
 금성정치군사대학
 
 김동식은 북한에서 고등중학교 5학년 1학기를 마친 직후인 1981년 3월 대남공작원으로 소환된다. 고등중학교 4학년 생활을 하는 1년 내내 체력에서 학습 능력까지 각종 테스트를 통과한 결과였다.
 
 그해 김동식은 공작원으로 선발되면서 금성정치군사대학에 입학한다. 금성정치군사대학은 1990년대 초에 김정일정치군사대학으로 개칭했다. 당시 북한에서 살아 있던 김정일의 이름을 붙인 유일한 대학이었다. 김정일 이름을 붙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대학은 북한 최고의 대학이다.
 
 이 대학의 신입생은 출신성분, 체력, 용모, 지적수준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거의 완벽한 대상들을 북한 전역에 걸쳐 1개 군당 1~2명 정도만 선발한다. 어떤 군에서는 한 명도 입학생을 배출 못 하는 곳도 있다. 이 대학의 입학생이 결정된 후에야 김일성대학 등 다른 대학들은 입학생을 선발한다.
 
 김일성종합대학이 금성정치군사대학에 앞서는 것은 고위급 간부들의 자식들이 많다는 정도다. 금성정치군사대학에는 고위급 간부들의 자식이 극히 적다.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는 공작원이나 전투원들을 양성하는 대학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중하위급 간부나 노동자와 농민의 자식들이다. 이 대학은 먹는 것이 자유롭고 담배를 공급해 주는 유일한 대학이기도 하다. 대학 재학 4년 동안 방학은 물론 휴가, 면회, 외출, 외박 등 외부와의 접촉은 일절 허용하지 않는다.
 
 김동식은 국가졸업시험을 본 1985년 2월 노동당 후보당원으로 입당한다. 원래 다른 일반 대학들에서는 대학생활 기간에 노동당에 입당시키는 경우가 없다. 대학생활 기간에 입당시키는 것도 금성정치군사대학만의 특권이자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김동식의 동기생 160명 중 노동당에 입당한 학생은 12명이었다.
 
 김동식은 대학 졸업 후 공작원의 길을 걷게 된다. 공작원은 노동당 중앙위 부장보다 높은 권한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노동당 입당 결정권은 물론 당조직권까지 갖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사람들을 입당시킬 때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한은 집체적 협의체인 시·군급 당조직, 즉 당위원회가 갖고 있다. 아무리 책임비서라고 해도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공작원들은 공작지에 파견될 때 현지에서 포섭대상을 입당시키는 동시에 그에게 당원증 번호에 해당하는 연계대호를 부여하고 있다. 당 조직을 구성하고 해산할 수 있는 권한은 노동당 중앙위 조직부가 갖고 있다. 공작원들은 지하당 조직이기는 하지만 당 조직을 해산하고 구성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공작원 교육에서 만난 납북자들
 
김동식씨의 진술에 따라 경찰 관계자들이 무전기와 난수표 등을 찾는 모습.

 공작원 교육 가운데는 적구화(敵區化) 교육이라는 게 있다. 남한의 말과 생활풍습, 행동방식, 사회환경 등을 배우는, 한마디로 한국인화 교육이다. 적구화 교육을 위해 사용하는 자료로는 월북자들과 남한 연구자들이 쓴 각종 서적과 참고서, 텔레비전 프로그램, 각종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등 남한에서 제작된 영상·출판물들을 사용한다.
 
 김동식이 당시 공작원 교육을 받으며 시청했던 텔레비전 드라마 중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랑과 야망>, <도시의 얼굴>, <서울 뚝배기>, <사랑이 뭐길래>, <서울의 달> 등이다. 당시 6대 일간지였던 《조선일보》, 《한국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 《동아일보》, 《중앙일보》도 구독했다. 주간지로는 《주간조선》, 《주간경향》, 《선데이 서울》, 《주간한국》을, 월간지로는 《월간조선》, 《신동아》, 《월간중앙》, 《말》, 《길》, 《낚시춘추》 등이 교육에 활용됐다.
 
 공작원들의 적구화 교육을 담당한 강사들은 모두 남한 출신이다. 그중에는 자진 월북자도 있지만 나중에 김동식이 남한에 와서 알게 된 사실로는 일부 납북자도 있었다.
 
 김동식 등에게 서울말을 가르친 강사 중에 ‘하 선생’이라는 분이 있었다. 당시 30대 후반으로 키가 175cm 정도였다. 2005년 2월 2일자 《중앙일보》에 오대양 61, 62호 선원 24명과 휘영 37호 선원 12명 등 납북어부 36명이 묘향산 관광을 기념해서 찍은 사진이 게재됐는데 거기에 보니 하 선생도 있었다. 하 선생은 납북어부 출신이었던 것이다.
 
 김동식씨는 또 다른 납북자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전라도 출신의 황 선생이라는 춤 강사도 있었는데 당시 30대 후반으로 1980년대 초반에 상선을 타고 제3국에 갔다 그곳에 있는 북한공관으로 망명한 인물이다. 본인 말로는 가수 조용필을 따라다니면서 밴드에서 드럼을 쳤다고 하는데 노래 실력과 춤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의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당시 공개자료에는 그의 본명이 하영길로 나와 있었다.
 
 강사 중에는 강제 납북 고교생도 있었다. 1970년대 중후반에 서해에 있는 해수욕장이나 섬에 피서를 갔다가 납치된 사람들이었다. 마 선생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고교생 납북자 L씨였다. L씨는 충남 천안농고 재학 3학년 때 피서를 갔다가 납치됐다. 이들 가운데는 경기도 출신의 또 다른 납북 고교생 L씨도 있었다.〉
 
 적구화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평양 순안 초대소 지역에는 대일 공작과의 공작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쳐주는 초대소도 있다. 김동식이 한국인화 교육을 받은 초대소 지역에는 정부 현지화 교육을 위한 초대소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중국어, 일본어, 스페인어, 영어 등의 어학과 해당 국가의 문화를 가르치는 초대소들이 있었다.
 
 그 곳에는 일본인 강사도 있었다. 그의 부인도 일본인이었다고 김동식은 들어서 기억하고 있는데 납북자로 추정된다. 그 일본인 강사는 170cm 정도 키에 보통 체격이었고 안경을 쓰고 머리를 약간 기른 미남형의 얼굴이었다.
 
 
 敵區化 교육 중 이름을 외운 유명 스포츠인들
 
김동식씨는 북한에서 공작원 교육을 받을 때 한국인화 교육도 받았다. 교육을 담당한 강사 중에는 납북 고교생들도 있었는데 L씨(사진 왼쪽)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사진 오른쪽은 L씨와 함께 북으로 강제 납치돼 끌려간 C씨다. 실종 두 달쯤 전에 설악산 여행을 갔다가 찍은 사진이다.

 김동식은 적구화 교육 중 88서울올림픽 장면들을 비디오로 시청할 수 있었다. 당시에 유명한 스포츠인들에 대해서도 상식적으로 알아두도록 했는데 그때 기억해서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는 인물이 야구에서는 선동열, 이만수, 장종훈, 최동원, 김성한, 김재박 등, 프로복싱과 레슬링에서는 홍수환, 김일, 축구에서는 차범근, 최순호, 허정무 등이다.
 
 작가들 가운데는 이문열, 김동리, 최인호, 황석영, 고은, 정비석 등의 이름을 그때 기억했다. 한국노래 100곡 정도는 불러야 공작원이라고 했는데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허공’ 등을 포함해 1960년대부터 1980년대 말까지 히트한 대표곡을 부르고 가수들을 기억하게 했다.
 
 김정구, 고운봉, 현인 등 원로가수는 물론 배호, 윤항기, 남진, 나훈아, 서유석, 조용필, 현철, 전영록, 송대관, 태진아, 백년설, 이미자, 윤복희, 한명숙, 김세레나, 혜은이, 하춘화, 김수희, 김연자, 주현미, 최진희, 이은하, 정수라, 이선희 등이 그때 외운 가수들이다. 김동식은 이 가운데 조용필과 배호, 나훈아의 노래를 좋아했고 여자 가수로는 김수희와 윤복희, 하춘화, 심수봉의 노래를 좋아했다.
 
 1989년 7월 초에는 남한에서 개최한 88올림픽에 대응해 평양에서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열렸다. 이 축전의 개·폐막식 행사에는 김일성, 김정일이 모두 참석했는데 김동식도 이 개·폐막식 행사에 초대돼 관람할 수 있었다.
 
 당시 남한에서는 임수경이 전대협 대표로 참가해서 북한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임수경은 세계 각국 대표들이 입장할 때 남한 대표로서 전대협 로고가 새겨진 깃발을 앞세우고 입장했다. 그런데 그가 입장하는 과정에 김일성, 김정일이 자리 잡고 있는 주석단 앞에서 멈춘 다음 허리를 90도 각도로 굽혀 정중히 인사를 했다. 김동식은 임수경의 그런 모습을 보고 관중이 기립 박수를 보내던 광경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당시 임수경이 보여준 거침없는 모습은 북한 대학생들의 인기를 끌기에 충분했다. 북한 대학생들은 임수경이 미리 준비한 원고도 보지 않고 당당하게 연설하는 모습을 보고 남한 대학생들이 아는 것도 많고 말도 잘한다며 부러워하기도 했다.
 
 
 두 번째 남파
 
 1차 남한 침투 공작에 성공한 후 영웅 칭호까지 받은 김동식은 함께 남파됐던 조장 권중현과 함께 1991년 2월부터 93년 3월까지 2년 동안 연구원 교육을 받게 된다.
 
 연구원 교육과정은 쉽게 말해 남한의 대학원 과정과 비슷한 것이다. 각 전공 학문 분야의 박사, 교수를 비롯한 석학들을 초대소로 초빙해 공작원들을 개별적으로 상대하면서 강의와 토론을 지도하는 방식이다.
 
 연구원 교육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1992년 가을 《노동신문》을 읽다가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의 성명을 보게 됐다. 남한 수사 당국에서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 지역당 사건’을 발표한 것에 대해 남한에서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성명서였다.
 
 김동식은 그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담당 부부장이 중국 북경에 학술회의 참석차 갔다가 S씨(1차 침투 시 포섭)를 만나고 왔다면서 그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고 칭찬했던 것이 불과 며칠 전인데 그 사이에 조직이 노출됐다고 하니 차마 믿어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노동신문》이 북한 대남부서에서 한 소행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김동식으로서는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몇 달 동안 공들여 만들어놓은 남한의 지하당 조직을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말아먹었으니 참으로 분통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죽을 고생을 하며 해놓은 일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편안히 앉아서 지도하는 몇 명의 사람들이 일을 잘못해 그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들에 대해 심한 배신감도 느꼈다. 김동식과 권중현은 담당 지도원과 과장 등 간부들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들은 미안하다는 말 외에 왜 조직 노출 사고가 발생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1995년 8월 초순 김동식은 대남침투와 관련된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번에는 조원 박광남을 거느린 조장으로서였다.
 
 김동식이 당시 부여받은 가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는 1980년 4월에 남파돼 활동 중인 봉화 1호를 접선해 대동 복귀하라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가 포섭한 ‘고봉산’을 접촉해 유력 대선후보 측과의 핫라인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김동식 공작조는 김정일이 유력 대선후보에게 파견한 밀사였던 셈이다.
 
 고봉산은 봉화 1호가 포섭했다고 북한에 보고했던 대상인데 유명 문인 K씨를 지칭한 것이다. 2차 침투를 지시한 이원국 부부장은 김동식조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는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이 대통령에 당선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소.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와의 비상 연락선을 구축해 놓아야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원활한 연락을 유지할 수 있소. 그러기 위해서 이번에 선생들이 파견되는 것이오. 현재 ○○○ 주변에는 사람이 많지만 대부분 국회의원이거나 공개되고 노출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중간에서 비공개적으로 연락원 역할을 할 사람들이 많지 않소. 그런 의미에서 K씨는 ○○○과 우리를 가운데서 연계시켜 줄 적임자라고 할 수 있소. 그래서 이번에 선생들이 나가서 K를 통해 비상연락선을 만들어놓고 와야겠소.”
 
 나중에 알게 됐지만 봉화 1호가 이미 검거돼 전향했기 때문에 계획은 물거품이 된 상황이었다. 북한이 ○○○과의 비상연락망을 이어줄 것이라고 거명한 K씨도 접촉을 시도해 봤지만 그 사람에 대한 포섭도 실패했다.
 
 이와 함께 김동식이 두 번째 침투에서 부여받은 1980년대 청년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주요 인물들을 포섭해 지하당 조직을 구축하라는 임무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포섭에 실패한 것이다. 김동식은 남파될 때 북한에서 열 명의 공작대상을 선정하고 왔지만, 그 가운데 7명만 만날 수 있었고, 한 명도 포섭하지 못했다. 그리고 봉화 1호와의 접선 과정에서 체포당함으로써 김동식의 15년 공작원 생활은 마감됐다.⊙


http://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zw0He7v-U0MJ:monthly.chosun.com/client/news/print.asp?ctcd=I&nNewsNumb=201307100021+&cd=2&hl=ko&ct=clnk&gl=kr&client=firefox-b




남파 공작원 김동식(50)은 어디에 내놔도 그의 전력(前歷)을 짐작할 사람들이 없을 것 같았다. 눈에 익은 정치인, 연예인 누구와 닮아 보이기도 했다.

그가 내민 명함에는 ‘곽××’로 되어 있었다. 가명(假名)이다. 바깥세상에 알려진 ‘김동식’도 가명이다.

―내가 어떻게 불러야 하나?

"김 선생이라 해도 되고, 곽 선생이라 해도 된다. 내 본관은 현풍 곽씨다."

그는 자신의 젊은 날 역정을 담은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는 제목의 책을 냈다. 1990년과 1995년, 그는 두 차례 침투했다. 첫 번째 공작에는 성공해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고, 다시 침투했을 때는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체포됐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얘기여서, 나는 가급적 ‘팩트’ 위주로 질문했다.


김동식씨
김동식씨는“공작원들은 접선 및 장비 은닉 장소로 묘지를 많이 썼다”고 말했다. 그는 얼굴 노출을 꺼렸다. /허영한 기자
그는 동료와 함께 1990년 5월 26일 남포에서 ‘전투 선박(공작선을 지칭)’을 탔다. 배에는 이들을 침투 지점까지 안내할 전투원 20여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공작선은 중국 산둥반도에서 하루 정박해 물과 부식, 기름을 보급받은 뒤 공해(公海)로 이동했다.

"나흘 만에 제주도 남단에 도착한 뒤 반잠수정으로 옮겨 탔다. 해안선을 1㎞쯤 앞두고는 잠수해서 자정쯤 서귀포 보목동 해안에 상륙했다. 동행한 안내조에게 잠수복을 넘겨주고 헤어졌다."

―야간에 서귀포 KAL호텔을 향해 걸어가 근처 ‘묘지’ 주위에 단파 무전기 두 대, 벨기에산 브라우닝 권총 두 정과 실탄, 수류탄 4발, 야간 투시경 1개, 다른 공작조에게 넘겨줄 5만달러 등을 묻었다. 당신의 다른 행적에서도 ‘묘지’가 많이 등장한다.

"산속에는 특징적인 기준점이 없어 공작원들은 접선 및 장비 은닉 장소로 묘지를 많이 썼다. 내가 잡히면서 이런 사실이 알려졌다. 그 뒤에 잡힌 공작원들은 그렇게 안 했다. ‘저쪽에서 감시하고 있으니 묘를 쓰지 마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당신 이후에 다른 공작원이 잡혔다는 뜻인데?

"1997년 울산에서 ‘부부 공작원’이 잡혔다. 여자는 자살하고, 남자는 살아 있다."

―부부 공작원은 당신 제보로 검거됐나?

"그건 아니다. 이들은 울산에서 활동하던 운동권 인사 J씨를 포섭하려고 만났다. J씨는 ‘북에서 내려왔다’는 이들을 ‘기관원’으로 오인했다. 소위 안기부가 ‘프락치 공작’을 하는 걸로 판단했다. 그래서 안기부를 골탕 먹이려고 ‘내게 간첩이 찾아왔다’고 신고해버린 것이다. 이들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J씨와 다시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서 붙잡혔다."

―당신도 서울 시내의 한 커피숍에서 학생운동권 출신 L씨(현 국회의원)를 만나 포섭하려고 했을 때 그에게 ‘기관원’으로 몰린 적이 있지 않은가?

“당시 L씨는 그대로 나가버려 다시 접촉할 수 없었다. 내가 ‘북한에서 온 당 연락대표’라고 밝혔을 때 이렇게 나온 사람은 L씨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아무도 당신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책 제목이 나온 것인가?

"1990년대에는 운동권 내부의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북한과 연계를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자기들끼리 암암리에 ‘너희는 라인이 있나?’하고 물었으니까. 입당(入黨) 제의를 하면 말 못 할 사정이 있어 못했을 뿐, 본인이 싫어서 안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첫 침투에서 4개월 20일간 체류했다. 일상에서 어떤 점을 가장 의식했나?

"서귀포에 침투한 뒤 처음 택시를 탔을 때다. 운전사에게 ‘동명백화점까지 갑시다’ 했는데, 그렇게 말을 걸기 전까지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비록 ‘적구화 교육(敵區化·남한의 말과 생활 등을 배우는 것)’은 받았으나 실제 남한에서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과연 말이 통할까’ 입속이 탔던 것이다."

―한국말이 외국어 배우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고 쓰여 있던데, 억양 때문인가?

"억양보다 입에 밴 북한 방언 때문에 힘들었다. ‘이자 왔어?(지금 왔어)’ ‘섟갈린다(헷갈린다)’ ‘인차 와(빨리 와)’ 같은 북한에서 많이 쓰는 방언들이 부지불식 튀어나와 아차 할 때가 많았다. 한국말에 섞인 ‘외래어’도 알아듣기 힘들었다."

―공작금으로 1만달러와 다른 공작조에 넘겨줄 5만달러를 들고 왔다. 우리 지폐가 아닌 달러로 들고 오는 이유가 있나?

"지도부에서 설명은 안 해주는데, 지폐 부피 때문에 그럴 것이다. 5만달러를 우리 화폐로 하면 한 배낭이 된다. 남대문 시장에서 어떻게 환전해야 하는지 교육받고 들어온다."

1996년 법정 출두 장면.
1996년 법정 출두 장면.
그는 서울에서 고정간첩 ‘이선실’과 접선했다. 이선실은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당 권력 서열 22위였다. 1979년 일본에서 공작선을 타고 월북해 김일성을 만난 뒤 조총련 모국 방문으로 위장해 국내에 들어온 인물이었다.

"일본을 통해 영주권을 얻어 합법적으로 잠입했으니, 북한 대남 공작에서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그는 고등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당시 75세 노인이었다. 우리가 얘기해줘도 포섭 대상에게 제대로 전달도 못했다."

―남한에서 이선실은 권력 서열 22위로서 어떤 핵심 역할을 했나?

"권력 서열과 실질적인 역할은 상관없다. 이선실은 민한당과 민가협, 민중당에 들락날락하면서 관계를 구축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친북 인사들을 점찍어두는 것이다.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은 채 장기 잠복했다. 하지만 1987년쯤 대남 전술이 ‘적극적인 포섭’으로 바뀌었다. 우리보다 먼저 1개 공작조가 이선실을 만나러 내려왔다. 공작조가 ‘그동안 찍어둔 인사들을 입당시키라는 지령이 내려왔다. 접촉해 포섭하라는 지령이 내려왔다’고 전했을 때, 이선실은 ‘김일성에게 직접 그런 말을 듣지 못했고 나는 준비되지 않았다’며 펄쩍 뛰었다."

―고정간첩의 정보 수집 활동에 의문이 간다. 우리 같은 열린 사회에서는 고급 기밀이 아닌 웬만한 정보는 인터넷이나 매스컴을 통해 다 공개돼 있다.

"인터넷으로는 누굴 포섭하거나 조직을 만들지는 못한다. 고첩의 역할은 사람들과관계를 맺는 데 있다. 정보는 그 기관에 있는 사람을 포섭하면 얻게 되지, 우리가 어디 가서 정보를 수집하겠나."

―고정간첩을 오래 하다 보면 남한 생활에 젖어 북한과 연락을 끊는 경우는 없는가?

"구체적인 사례는 모르지만, 사실 그럴 경우 마이크로 칩을 일일이 단 것도 아니고 북에서 찾을 방법이 없다. ‘행불(行不)’이 되는 것이다. 북에서 그런 행불된 간첩의 가족을 봤다. 북 입장에서는 판단할 수가 없어 난처하다. 영웅적 행위로 평가 내릴 수도, 배신자 가족으로 처벌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첫 침투에서 그는 이선실과 H씨(1980년 사북 사태 주동자)를 대동해 복귀하는 임무를 받았다. 복귀 접선 장소는 강화도 해안이었다. 1990년 10월 17일, 그는 아침과 저녁 시간에 평양방송에서 ‘내 고향’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오는지 확인했다.

"만약 그 노래가 나오면 접선할 수 없다는 신호가 된다. 그날 밤 11시쯤 북에서 내려온 안내조와 묘지에서 접선했다. 그 전에 서로 돌멩이를 두들기는 걸로 신호를 주고받고는 암호를 대 확인했다."

이들은 공작선을 타고 황해도 해주로 올라갔다. H씨는 노동당 입당과 무전기 사용, 암호 해독 등을 배우고 일주일 뒤 같은 루트로 내려왔다. 당시 그에게 “남조선 혁명가들과 인민들에게 신심과 용기를 줄 수 있게 친애하는 김정일 동지께서 배를 타고 인천을 통해 서울을 다녀갔다는 소문을 퍼뜨려라”는 북의 지시가 떨어졌다. 이선실은 2000년 북에서 사망했다.

―우리 정보 당국에서는 이선실이 북으로 복귀하고 난 뒤에야 그 존재를 알게 됐다. 함께 입북했던 H씨가 연루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1992년)이 터지면서였다.

"나도 북에서 ‘노동신문’을 보고 알았다. 노동신문에는 ‘남조선 정부의 조작’이라고 보도됐다. 내가 포섭 공작을 했던 인물인데 황당했다. 당시 나는 공작 부서에서 ‘누구는 목숨 걸고 해놓았는데 이런 식으로 다 망쳐놓느냐’고 소리친 적이 있었다."

인터뷰

―망쳐놓았다니, 그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 게 공작 부서와 무슨 상관이 있었나?

"이런 정보를 아는 공작 부서 요원이 남으로 넘어갔고, 거기서 추적이 시작된 걸로 안다. 이를 ‘중부지역당 사건’이라고 발표했지만, 사실은 별도의 3개 간첩 조직이 섞인 것이다. 수사 과정에서 운(運)도 좋았던 것 같다. S씨는 경기도에 있는 자신의 비닐하우스에 파묻어둔 무전기를 꺼내 치려다가 현장에서 붙잡혔다고 한다."

―당시 수사 발표가 대선 기간과 맞물렸다. 재야에서는 ‘평화적 민족 통일에 몸바친 양심수 석방 운동’도 전개했다.

"중요한 간첩 사건이었지만 선거로 인해 조용히 덮였던 셈이다."

―주범들은 1998년 모두 사면됐다. 그 뒤 노무현 정부 시절 ‘중부지역당 사건이 조작됐다’며 국정원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이를 재조사했다.

"내게도 조사관들이 찾아왔다. KAL기 폭파 사건의 증인이 김현희였다면, 이 사건에는 내가 살아 있는 증인이 됐다."

―1995년 10월 당신은 공작조장이 돼서 제주도 온평리 해안으로 다시 침투했다.

"1차 침투에서 이선실을 복귀시킨 공로로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러자 ‘젊은 놈이 영웅 칭호를 받더니 출세 생각만 한다. 사상이 변질됐다’는 등 별 험담을 다 들었다. 그래서 간부에게 ‘내가 증명해 보일 방법은 다시 나갔다 오는 것밖에 없다’고 했다. 승려로 위장한 고정간첩 ‘봉화 1호’를 복귀시키고 다른 인사들을 포섭하는 게 임무였다."

―‘봉화 1호’와 접선하려는 과정에서 붙잡혔다. 그가 이미 전향한 줄 몰랐나?

"1980년 봄에 남파된 그가 이미 가을에 체포됐던 걸 몰랐다. 그해 겨울에 그가‘나를 북으로 데려가 달라’는 무전을 쳐 공작선이 내려갔다. 그 공작선은 난파됐다. 그에 대한 의심은 있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북 입장에서는 15년 동안 농락당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를 복귀시키라는 임무가 내게 주어진 것이다."

그는 ‘봉화 1호’와 접선을 시도하려고 충남 부여의 한 사찰로 찾아갔다가 노출됐다. 이미 정보기관과 경찰이 잠복하고 있었다. 그는 왼쪽 다리에 한 발 맞아 쓰러졌고, 그의 조원은 숨졌다.

―그 뒤 ‘봉화 1호’와 만난 적 있나?

"그쪽에서 두세 번 만나자는 연락이 왔는데, 내가 감당이 안 되겠더라. 당시 쫓기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념을 떠나 내 조원이 죽었으니…."

―잡히지 않고 북한에 올라갔을 때의 삶과 비교해봤나?

"나도 인간인데 비교를 안 해봤겠나. 여기서는 평범한 시민으로 살고 있다. 북한으로 돌아갔으면 과장급(정부 실국장)쯤 됐겠지. 그래 봐야 대단할 게 없다. 실상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아마 북한에 갔어도 해외로 돈벌이를 나갔을 것이다."

그는 최근 ‘북한의 대남혁명전략 실체’로 북한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류길재 통일장관이 지도교수였다. 그의 두 아들은 아버지 과거에 대해 아직 모르고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7/28/2013072801855.html


덧글

  • 지나가던과객 2016/12/27 07:26 # 삭제 답글

    북한에 있는 '김동식'씨의 가족이 무사했으면 좋겠네요.
  • NET진보 2016/12/28 14:39 #

    슬프네요
  • 2016/12/27 20:2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12/28 14:3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6/12/28 14:4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6/12/28 16:1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6/12/28 16:5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6/12/28 16:58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6/12/28 17:02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진보만세 2016/12/28 14:51 # 답글

    잘 읽었어요.. 남북 대치 관계 속 북한의 비정규전 전략의 이해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 NET진보 2016/12/28 16:13 #

    북한은 통혁당이나 꾸준히 지하당이나 정치인 야권재야 학생운동권과 접촉 포섭으로 자신들에게유리한 남하의정치환경을 조성노력을 해왔죠. 저당시 전부늘과 접촉햇던분들이 야권유명정치인이거나 거대문인 이기도합니다. 그외에도 김대중 노무현시기 과거사 조사위라는 조직으로 법원판결응ㄹ 무효화시키거나 법원에서 이를 바탕으로 무죄를 내기도하는둥...먼산...그외에도 친북 정치범들에게 사면을 대거로 하기도햇죠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