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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3월 15일. 역사적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약속장소에 와서 보니 이미 김질락, 이문규 동지가 와 있었다. 신영복 동지가 들어오면서 분위기는 전보다도 훨씬 고조됐다.

그러면 전원 모이셨습니다.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께서 교시하신 주체의 당 창건 방침을 받들고, 그 사이 동지들께서 필사의 노력으로 분투하신 결과 오늘로서 우리는 <통일혁명당 창당준비위원회>의 결성을 보게 됐습니다.

어디까지나 우리 당이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의 혁명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한국혁명의 전위당인 만큼 당원과 각계의 애국민중을 하나의 혁명전선으로 결속해야 할 것이라는 정치활동의 목표로부터 출발해 우리 당 기관지를 <혁명전선>이라고 하면 어떤가 하고 생각합니다.


전원이 찬성했다...철필로 긁은 등사판으로 인쇄된 수십 부밖에 안 되는 신문이었지만 한국에서 발간된 최초의 김일성주의 출판물에 접했던 순간, 편집위원 전원의 눈이 잠시 뜨겁게 빛났다.

우리들은 이 힘 있는 정치선전수단으로 보다 많은 김일성주의자를 육성하고 각계각층 애국민중을 하나의 혁명전선, 통일혁명의 깃발 아래 강고하게 결집시키도록 합시다.               


- 통일혁명당 기관지 <혁명전선> 중에서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269479



발췌한 부분은 1964년 3월 15일, 비밀리 약속 장소에 모인 <통혁당> 무리들이 <혁명전선>의 창간을 공식 선언하는 장면을 묘사한 대목. 참석자로는 김질락, 이문규, 신영복 등의 이름이 언급돼 있다. 이 장면에서 <통혁당>의 임시투쟁 강령과 행동 목표, <혁명전선>의 발간 취지 등을 주창하고 있는 인물은 김종태 당시 <통혁당> 서울시당 위원장이었다.

첫머리만 읽어봐도 이들이 창당한 <통혁당>이 김일성 주체사상(主體思想)을 지도 이념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일성을 '민족의 태양'이라고 칭송한 이들은 <혁명전선>의 첫 인쇄물이 나오는 순간, 눈시울을 붉힐 정도로 종북주의(從北主義)에 깊이 몰입돼 있는 상태였다.

이날 모임에 마지막으로 참석한 신영복은 훗날 노회찬 전 의원으로부터 "마음으로 모시는 스승"이라는 극찬을 받는 '좌파계의 거두'로 성장한다. 오늘날엔 <처음처럼>이란 소주 상표의 원저작자로 더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 통혁당 무기수(無期囚) 출신, 인기 교수로 탈바꿈

68년 통혁당 사건으로 체포될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생도들에게 '경제학원론'을 가르쳤던 신영복은 20년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복역한 뒤에도 지난해까지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와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수많은 후학을 양성했다.
 
한명숙 전 총리의 남편 박성준 성공회대 겸임교수는 오래 전 신영복의 지도편달(?)로 <통혁당>에 입문한 케이스. 공연연출가 탁현민 교수와 폴리테이너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김제동, 가수 윤도현도 성공회대에 몸 담은 신영복이 배출한 '좌파 명사'들이다.

노회찬처럼 신영복이 옥중에서 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추종자'가 된 이들도 부지기수.

임영호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상임감사위원은 "그의 책들은 영혼을 파고드는 매력이 있다"고 극찬한 바 있으며,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나와 이웃의 관계를 성찰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책"이라는 호평을 남기기도 했다.

대중에게 친숙한 김제동이 존경해마지 않는 신영복은 젊은이들에겐 '꼰대 되기를 거부한', 쿨한 어르신으로 통한다.

그의 '과거'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당수의 청년들은 신영복을 군사독재정권 시절 용공(容共)조작에 휘말려 누명을 쓴 '피해자'로 인식하고 있다. 영화 <변호인>의 거짓 선동에 눈이 멀어, 명백한 공산화운동이었던 학림(學林)-부림(釜林) 사건을 용공조작사건으로 치부하는 행태와 마찬가지.

심지어 어떤 무리들은 신영복을 27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에 견주며 "우리 시대의 지성"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붙이기도 한다.

이처럼 신영복이 '거룩한 투사'이자 '대표적 철인(哲人)'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잘못된 정보'가 마치 사실처럼 왜곡돼 회자되고 있기 때문이다.

본인의 입을 통해, 혹은 지인들을 통해 전파된 각종 미화(美化)된 이야기들이 '신영복을 수식하는 역사'로 알려지면서, 김일성 사상 전파에 매진했던 그가 '존경 받는 지성'으로 둔갑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 것.



◆ 신영복, 통혁당 창당준비위부터 관여


서울상대 재학 시절부터 학생운동에 몰두했던 신영복은 60년대 중반 무렵 학교 선배인 김질락, 이진영 등과 친분을 나누게 되면서 <통혁당>의 핵심 멤버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신영복이 <통혁당>의 합법 기관지로 알려진 <청맥>에서 활동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이전부터 <통혁당>의 비합법기관지인 <혁명전선>에도 깊이 관여돼 있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2006년 <한겨레21>에 기고한 <신영복의 60년을 사색한다>라는 제하의 글에서(신영복 본인의 발언을 인용), "신영복은 1965년 2학기나 1966년 초에 <청맥>이라는 잡지를 통해 <통혁당>과 관련을 맺게 됐지만, 최고 책임자로 발표된 김종태나 조국해방전선 책임자로 발표된 이문규 등 핵심 간부들은 사건이 날 때까지 만나본 적도 없다"고 했다면서 신영복을 변호하고 있다.

이문규야 학생운동 선배라서 이름 정도는 들어보았지만, 김종태에 대해서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신영복이 김질락과 만난 횟수는 <청맥> 잡지사에서 여러 사람이 같이 모인 것까지 합쳐 전부 10번 안팎일 것이고, 김질락의 집에서 이진영과 함께 따로 만난 것은 5번 정도라 하니 참으로 비싼 징역을 산 셈이다.


한홍구 교수는 "그런데도 공안당국의 기록은 물론이고, 진보 진영에서 나온 통혁당 관련 일부 서적에는 신영복이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등과 함께 통혁당의 강령을 정하는 등 당의 핵심 성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나온다"며 "신영복은 '통혁당에 대해서는 자신은 전혀 알지 못했고 중앙정보부에 가서야 들었다'고 했다"는 얘기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중앙정보부에서의 수사는 혹독했다. 이미 김질락이 다 불은 터라, 저들은 신영복이 전혀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었다. 청년기의 고민과 방황이 어린 수많은 만남과 토론, 그리고 서로 빌려주고 빌려 보았던 수많은 책들은 몇십 장의 자술서와 몇십 장의 조서와 몇 줄의 법률용어에 의해 온통 조직적인 관계로 규정됐다.


신영복의 혐의를 최소화하는 이같은 주장은 "▲신영복이 통혁당에 가입한 적도 없고 ▲김질락 이외에는 통혁당 지도부인 김종태나 이문규를 만난 적도 없으면서 ▲대표적인 통혁당 지도간부로 낙인찍혔다"는 '왜곡된 사실'이 정설로 둔갑·회자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신영복은 <통혁당>의 공식 기관지로 소개된 <청맥> 외에도 비선에서 운용됐던 또 다른 기관지 <혁명전선>에도 필진으로 합류, 종북-반미-반정부 사상 운동을 주도해왔다.

한홍구 교수는 "신영복이 1965년 2학기나 1966년 초부터 김질락 등을 만났다"고 기술했으나, <혁명전선>은 신영복이 1964년부터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 등과 '거사'를 도모해왔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통혁당>이 김일성 장군의 혁명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한국 혁명의 전위당인 만큼, 당 기관지 이름을 <혁명전선>으로 하자"는 김종태의 제안에 제일 먼저 찬성표를 던진 이도 신영복이었다.

이는 "신영복이 해당 모임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할 입장은 아니었다"는 한홍구 교수의 [엄호사격]과도 대치되는 대목이다.



◆ 한명숙 남편 박성준, 신영복에 '포섭' 당해 좌경화


서울대 경제학과 재학 시절 김종태에게 포섭돼 사상 교육과 학습을 받은 신영복은 학교 후배인 박성준을 끌어 들여 <청맥> 발행을 이끄는 등, 그룹 내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왔다.

<월간조선>에 따르면 신영복은 김질락에게 육사생도 9명에 대한 교양상황과 '박성준을 포섭했다'는 내용이 담긴 철학 노트를 건네고, "박성준 등을 조종해 명동 가두 시위를 벌였다"는 활동 내역까지 보고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1967년 오후 3시 김질락은 잔디다방에서 신영복으로부터 "경제복지회 내에 있는 성원인 박성준을 조정하여 시내 각 대학생 100여 명을 규합, 7월 2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명동에 집결시켜 6·8 부정선거 규탄구호를 외치면서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앞 노상까지 데모 행진을 감행했다"는 보고를 받고 신영복을 격려했다.


신영복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대법원 판결문에도 이같은 '이적 행위'가 자세히 기술돼 있다.

1966년 중순경 김질락은 서울 중구 무교동 소재의 한 다방에서 북괴의 이익이 되는 점을 알면서 김종태를 만나 그에게 '신영복을 포섭하였다'고 보고했고, 김종태로부터 '신영복에게 교양을 주어 하부조직을 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아 反국가단체인 북괴를 이롭게 했다.

1966년 8월 서울 서대문구 갈현동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서 신영복에게 '육사교관과 생도를 포섭할 것', '월 2~3회씩 집에서 회합할 것', '각자의 활동상황을 정기 회합 時 보고할 것' 등을 지시하고,'청춘의 노래'라는 불온서적을 제공하여 反국가단체를 이롭게 했다.


<통혁당>의 하부조직인 <민족해방전선>의 대학가 책임자였던 신영복은 88년 출옥 후 "자기가 통혁당에 가담한 것은 이념 때문이기보다 양심의 문제였다"는 궤변을 토해 논란을 빚었다. "이념에 휩쓸려 움직인 게 아니라, 인간 본연의 양심에 비추어 거리낌 없이 행동했을 뿐"이라며 사상적 전복(顚覆)을 시도했던 자신의 행위를 미화하는 모습을 보인 것.

그러나 <통혁당>의 주역 김질락이 감옥에서 집필한 수기 <주암산>을 보면 <통혁당>과 산하 조직은 개인의 양심이 아닌, 북한의 '지령'을 받아 움직인 지하당이었음이 명확해진다.

통일혁명당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비밀 지하당 조직이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리 없고 통혁당의 조직상황과 활동상황이 김일성에게 직접 보고 됐다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 통혁당은 '남조선 혁명은 남조선 인민의 힘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각계각층에 대한 군중공작을 광범위하게 전개했다.


<통혁당>은 61년 간첩 김수영에게 포섭돼 조선노동당에 입당한 전남 무안 출신 최영도가 김종태를 포섭하면서부터 시작됐다.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한 최영도는 김종태를 통해 <남로당> 조직의 부활을 꿈꿨고, 마찬가지로 직접 북한에 들어가 조선노동당원이 된 김종태는 김질락과 이문규를 꼬드겨 <통일혁명당>을 만들었다.

<통혁당>은 서울시당 위원장을 맡은 김종태를 중심으로, 김질락-신영복이 주도한 <민족해방전선>과 이문규-이재학이 주도한 <조국해방전선>, 두 개의 하부조직으로 구성됐다. 당시 <통혁당>은 <새문화연구회>, <청맥회>, <동학회> 등의 서클을 운영하는 한편, <혁명전선>과 <청맥> 등 당 기관 잡지를 발간해 젊은층을 반정부 사상으로 고취시키는 공작을 전개했다.

우두머리격인 김종태는 당시 북한의 대남사업총국장 허봉학으로부터 미화 7만 달러, 한화 3천만 원, 일화 50만 엔의 공작금을 받으며 지령대로 움직였던 하수인에 불과했다. 

북한은 김종태 등 <통혁당> 조직이 공안 당국에 검거되자 이들을 구하기 위해 753부대 소속 공작선을 보내기도 했다. 68년 8월 20일 14명의 무장공비를 태운 간첩선은 제주도에 상륙을 시도했으나 12명이 사살되고 2명은 생포됐다.

69년 7월 10일 김종태가 사형되자 북한 내각은 그에게 최고훈장인 '금성메달'과 '국기훈장제1급'을 내렸다.



◆ 신영복과 박성준, 잘못된 만남?


한명숙 전 총리가 학창 시절 <경제복지회> 활동을 하지 않고 박성준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 적어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쇠창살에 갇히는 지금의 운명과는 사뭇 다른 행보를 걸었을 것이다.

어찌보면 <통혁당>의 핵심 리더였던 신영복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신영복이 박성준을 포섭하지 않았다면, 한명숙이 남편을 따라 서슬푸른 '재야운동가'로 변신할 일도 없었을 터. 신영복의 설득에 넘어가 본격적인 공산화운동에 뛰어든 박성준은 연합서클인 경제복지회 활동을 하면서 당시 이대생이던 한명숙을 만났다.

한명숙은 1967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박성준과 혼례를 올렸다. 하지만 이로부터 6개월 뒤 박성준-한명숙 부부는 신영복과 함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재판 결과 한명숙은 징역 1년,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 형을 언도 받으며 풀려났지만, 박성준은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고, 무려 12년이란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했다.

남편을 대신해 좌익 깃발을 높이든 한명숙은 1979년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으로 2년간 감옥생활을 하는 등 꽤 거친 '광야 생활'을 하다 2000년 DJ의 부름을 받고 정치권에 입문했다. 여성부 초대 장관을 지냈고 2006년엔 헌정 사상 첫 여성 총리로 지명돼 화제를 모았었다.

<통혁당> 활동 혐의로 검거될 당시 박성준은 서울대 경제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 신분이었다. 그는 66년 신영복에게 포섭돼 김일성 사상 교육을 받고, 6.8부정선거 규탄 데모를 벌이는 등 <통혁당> 멤버들의 수족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당시 박성준은 자신에게 유죄를 언도한 재판부의 판결에 불복, 항소심을 제기했는데 "사상을 전수해준 신영복을 지나치게 믿었다"며 스스로를 자책하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민족해방전선>을 구성한 바 없으며, 4.19 묘지에서 북괴를 이롭게 하는 행위를 한 사실도 없고, 그 밖에 이 사건 책자를 구입하거나 빌려 보거나, 빌려 주고, 필기시키고 한 모든 행위가 북괴를 이롭게 한 것이 아니며, 신영복을 지나치게 믿은 나머지 경솔한 소행을 하기에 이른 것이니 기독교인으로서 깊이 반성한다.



◆ '반자본주의자' 신영복을 <중앙일보>가 미화?


1964년 서울에서 발족한 <통혁당>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움직인 '지하당'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민족해방전선> 조직비서를 맡았던 신영복의 역할은 꽤 컸다.

서울대 재학 시절, 아래로는 <혁명전선>이라는 지하신문을, 위로는 <청맥>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며 반미-반정부 사상을 고취하는데 앞장서 온 신영복은 출옥한 이후에도 여전히 '비뚤어진' 사고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가 발췌한 신영복의 '어록'을 살펴보면 그가 아직도 철저한 '반미-반자본주의자'로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이 한국의 은인이라는 환상을 청산하고, 미국이 한국에 친미적 분단정권을 창출하고 미국경제의 하위 경제구조를 편성한 나라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한반도의 전쟁위험은 북한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으로부터 올 수 있다.

한반도의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고 북한이 자기들의 경제문제에 전력투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북한 핵의 기본이다. 북한 핵을 북한 정치지도자의 야심이나 북한의 정치적 오판으로 설명하는 것은 잘못이다.


놀라운 사실은 자신이 '반자본주의자'라는 것을 감추지 않는 신영복을 자본주의의 '최대 수혜 집단'인 삼성의 <중앙일보>가 수차례 대서특필했다는 점이다.

일례로 <중앙일보>는 지난 4월 25일 신간 안내 코너를 통해 신영복이 지은 <담론>을 그의 약력과 함께 성심껏 소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이름 석 자는 한때 '갇혀있는 이'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내고픈 편지의 대표 발신자였다. 1988년 출간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20년 20일을 '짐승의 시간'에 묶여 지내야 했던 한 양심수의 고백이자 연서로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고전에서 읽은 세계 인식'을 한 손에, '인간 이해와 자기 성찰'을 또 한 손에 든 인간 농부가 되었다. 인간과 세계, 사람과 삶을 파헤쳐 농사짓는 일이 공부라며 그 고생길에 함께 나서자고 손을 내민다. 사상범들이 한데 모여 있어 '한국의 모스크바'라 불리던 대전교도소에서 맺었던 스승들과의 관계를 그는 이제 이웃에게 되돌려 보낸다.


<중앙일보>는 이 기사에서 "1988년 출간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20년 20일을 '짐승의 시간'에 묶여 지내야 했던 한 양심수의 고백이자 연서"라며 "무기수와 장기수의 방에서 휴지며 엽서에 철필로 쓴 그 서신은 창백한 지식인이 가슴에 긁은 자기개조의 기록"이라고 묘사했다.

신영복을 '양심수'로, 그가 써 내려간 옥중서신을 '자기개조의 기록'이라고 표현한 <중앙일보>는 신영복의 '전향(轉向)'을 눈꼽 만큼도 의심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신영복은 1970년 옥중에서 '전향서에 도장 찍은 것'을 후회했다고 밝힌 바 있다. 젊은 시절 <통혁당> 하부 조직에서 활동했던 그 사상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음을 실토한 것.

이같은 점은 신영복이 지난 2002년 1월 17일 연세대에서 가진 한 강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자본주의 체제, 종속적 자본주의, 천민적 자본주의가 우리나라에 언제까지 갈 것인가? 나도 몰라. 그러나 논리적 이론적 사고를 한다면 비인간적 근본적 모순구조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자본 축척은 근본적 모순체제다. 힘들어도 샛길은 없다. 사회를 바꾸어 내자. 정말 황폐화된 인간관계 삶의 일부로서 실천해야한다.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52343&C_CC=AB


복수의 자료에 따르면 통혁당의 지도이념은 ‘김일성 주체사상’이었으며, 黨의 최고목적은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

일례로 도서출판 ‘대동’이 1989년 발간한《통혁당》에 따르면 “(통혁당은)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남조선의 혁명적 당”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책은 통혁당이 1967년 발간한 非합법기관지 <혁명전선>의 내용이 게재되어 있는데 일부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1964년 3월15일. 역사적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중략) 약속장소에 와서 보니 이미 김질락, 이문규 동지가 와 있었다. 신영복 동지가 들어오면서 분위기는 전보다도 훨씬 고조되었다. 김종태 동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전원 모이셨습니다.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께서 교시하신 주체의 당 창건 방침을 받들고, 그 사이 동지들께서 필사의 노력으로 분투하신 결과 오늘로써 우리는 통일혁명당 창당준비위원회의 결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임시투쟁 강령과 행동목표에 대한 심의에 들어갔다.
 
“통일혁명당은 민족의 태양, 김일성 동지의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을 지도적 지침으로 하는 한국근로민중의 전위조직이다...(중략)”
 
어디까지나 우리 당이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의 혁명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한국혁명의 전위당인 만큼 당원과 각계의 애국민중을 하나의 혁명전선으로 결속해야 할 것이라는 정치활동의 목표로부터 출발하여 우리 당 기관지를 <혁명전선>이라고 하면 어떤가 하고 생각합니다. 김종태 동지의 제안에 신영복 동지가 우선 찬동하였다.
 
“조국통일과 한국혁명이라는 우리 당의 과제도 함축되어 있고 통일혁명당이라는 우리 당의 이름도 반영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좋다고 생각합니다.”
 
전원이 찬성하였다...(중략) 철필로 긁은 등사판으로 인쇄된 수십 부밖에 안 되는 신문이었지만 한국에서 발간된 최초의 김일성주의 출판물에 접했던 순간 편집위원 전원이 눈의 잠시 뜨겁게 빛났다. 흥분하여 눈물을 머금은 목소리로 김종태 동지가 입을 열었다.
 
“동지들, 기관지 창간으로 우리들도 바야흐로 진리의 불모지인 이 한국 땅에 영생불멸의 김일성주의 사상이론을 정력적으로 보급할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통혁당의 이름과 함께 역사에 남을 하나의 거대한 사건입니다. 우리들은 이 힘 있는 정치선전수단으로 보다 많은 김일성주의자를 육성하고 각계각층 애국민중을 하나의 혁명전선, 통일혁명의 깃발 아래 강고하게 결집시키도록 합시다!”>
 

기사본문 이미지


통혁당은 또 창당선언문을 통해 “黨의 최고목적은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며, 당면 목적은 한국에서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아래와 같이 밝혔다.  

<▲한국 사회의 모순과 병폐의 근원은 美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와 후진적인 식민지 반봉건적인 사회제도에 있음. ▲진정한 자유와 복리를 향유하는 길은 부패 변질된 현존제도를 전복하고 자주적이며 민주주의적인 새 사회제도를 수립하는 것임. ▲한국에서 혁명은 필연적이고 불가피하며, 한국혁명은 한국인민의 주동적 역할에 의해 수행돼야 하며, 혁명이란 반혁명세력에 대한 혁명세력의 판갈이 싸움으로 反혁명은 오직 폭력혁명에 의해서만 타도될 수 있음. ▲혁명의 승리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혁명역량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혁명역량을 편성, 성장 발전시키는데서 중핵으로 되는 것은 혁명의 조직자이며 향도력인 黨이 가지는 것임. ▲통혁당은 그 계급적 기반과 지도이념, 투쟁목적상 일체 기성 정당파 정당들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새 형의 마르크스-레닌주의 黨으로 노동계급과 농민을 위시한 근로인민대중의 이익을 대변해 옹호함. ▲통혁당의 지도이념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現 시대와 우리 조국 현실에 독창적으로 구현한 김일성의 주체사상임. ▲黨의 최고목적은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며, 당면 목적은 한국에서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수행해 부패한 식민지 반봉건적인 사회제도를 전복하고 인민민주주의 제도를 건립하며 나아가 국토통일의 대업을 성취하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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