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대후반이 넘어가고30대가 되어가는 나는 개인적으로 친가 외가 할아버지 할머니에대한 직접적인 기억이 전반적으로없다
대부분 내가 어릴적/ 그이전 돌아가셧기때문일것...다만 친척과 부모님에게들은 기억으로 정리해본다.
2. 친가와 외가는 모두 창녕이다.
친가는 마산 진동에 잇다가 - 고조할아버지때 창녕으로 왓엇다고한다.대한제국-일제시대
...이지역엔 아버지 성씨가 적지만 상당수 잇다...그래서 온게 아닌가싶다.
나의 친 할아버지는 일제시대 태어나 6.25전쟁?!/625종료?! 아무튼 군으로 임관을 한이후 할머니와함께 군에서 생활하시다.
내려보내려다 제대를 1달 앞두고 갑작스레 고열로인해 사망을 하셧다.
아마 임관이후엔 임광으로 저장한돈으로 고향으로내려가 집안을 일크키려고햇엇던게 아닌시가싶다.
당시 군에갈정도면 나름 운도 좋은 편이였이라라 생각된다.
1달만에 고열로인한 사망햇다고한 병적기록부가 제적등본에 잇는것,,.할아버지가 근무해 있엇던 곳을 보면;;
아마 한탄병이라 불리우는 유행성출열혈에 사망하신게 아닌가싶다.
당시에는 현충원이 존재하지않았고,,,,,지금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현재 현충원에 게신다.
증조할머니와 할머니가 계셧던 그ㄸ;;; 가장이 없으니 급격히 기울어졌고....유공자 제대로 혜택도못받으셧던듯...
할머니는 아버지가 중학교시절 고생하시다 병으로 사망하셧고. ....
할머니께서 아프시자...병원비조라 얼마 가지고잇던 논밭 을 파는 와중에 아버지의 외가쪽에 금전 사기를 당햇엇다라고한다.
추가로 나중에밝혀진이야기지만 할아버지논밭을 부치던 소작인 친척이 밭을 경영하면서 모른척해서...
나ㅈ조상땅찾기해서 밝혀진 사실이지만... 몇십년동안 세금을 낸덕에.. 그 소작인에게 결국 넘어가버렷다.
아버지는 50대 이후에서야 군유공자 혜택을 받을수있다라는것을 아셧고..
어릴적 군유공자대우를 못받앗던것에대해 아쉬워하셨다.
어릴적..움막과 비슷한집에서 흙집에서 살았다라는것을 회고하신것을 보아.. 무척이나 힘들엇엇던듯
할머니가 돌아가신 나중엔 증조할머니 와 할아버지의 여동생, 아버지의 고모댁에 살게되는데...
아버지의 고모는 당시 사별후 재혼을 햇엇던지라...눈치밥이 나름있으셧던듯
그럼에도 나름 취업이후에 돈도 지워내드리고 돼지도 사라고 넣어드리고....
할아버지에게로 받은 논밭도 얼마 부치게햇엇으나....소작도 제대로안주고해서해서 스트레스가심하셧엇듯...
나중에 또 이쪽 분과;;;; 돈에대해 송사가 끝이지않앗던터라....거의 교류가귾어짐....
그와중에 상경계열당시 공업고에 진학 이후 나름 나가던 지역대기업에취업하서 나름 자부심이강하셧다.
해당 대기업이 대거 imf덕에 실직하게 되셧고..고집이 유독강하지신것을 보아...힘들어하셧던듯;;
친가쪽은 할아버지가 아버지가아직 태어나기전 일찍돌아가신데다.
할아버지의 형제도 실종된상태고.. 민주쪽으로 징용으로 끌려간 기록이잇다.
그외엔 고조할아버지 형제 가족대인데....사실상 남남인지라;;
기껏 유공자혜택신청서류를 하려던차에....아버지가 신청한지 2년이지나고 아버지가돌아가신 3개월이후에
유공자혜택이 가능함과 할아버지할머니 현충원 이장이 가능하다라는 서류가 날라와서..
끝까지 유공자혜택을 받지못하셨던 아버지가...안타까웟음;;;
어미니가 결혼후 증조할머니를 몇년간 모시고사셧는데....음...시집살이가 고되엇다라는 야야기가 있었고;;
내가 태어나기전 돌아가셨던듯...
이런저런 형편덕에... 친가쪽 친적도수도적고...교류하는 친가 친척이 전무함
아버지도 어릴적이 힘드셔서 그러가;; 이야기를 잘 안해주셧고....
증보할머니 고모할머니에게 어머니가 들은 이야기나 어쩌다가 아버지 가끔하신 이야기 ,
벌초 성묘하다 혹은 인사치레 만나는 고모할머니에게 수분 이야기를 종합해봄
3. 외할아버지 외가집은 창녕 기반의 성씨중 하나로.. 전통적인 농촌의.성씨 중심 촌락의 장손이였음.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동네 슈퍼마켓을 운영하시며. 유독 반공을 강조하셧던기억이다.
내가 4살때까지는...기억 하지만 5살때 돌아가셧다../
이모/외삼촌 어머니 에게 들어본 외할아버지는
어릴적 서당을 가셧고 나름 한학에 자부심이 강하셨던모양이다.
외할아버지의 청년기는 잘모르나 결혼후 큰이모님을 남겨두고...일제시절 징용으로끌려가서..
성씨촌락의 대표로 끌려갔엇다라는것...징용당시 입대선서같은거에 장같은것일 해야햇엇다고한다.
남방으로가셔서 먹을것이 없어서 땅에서 고구마 마 같은것을 캐먹으면서 고생하셧엇다라는것
고생하면서 바나나를 그때 처음으로 먹엇어는데 씨가많앗더라라는것...그게 바나나라는것도 80년대들어서야 아셧다고;;
해방이후에도 지역위원에 참여해서 창녕군을 만드는 기초 분위에서 활동 하셧다는것
(이로 인해인지 1970대까지 지역정치인들에게 편지왕래도 많이 왓엇다고 한다. )
6.25 피난당시 마을에 남지 혹은 밀양으로 피난가는 두부류가잇었는데....
외할아버지네가족들은 밀양으로 가는 바람에 사망을 면할수잇엇다는것...
남지로피난갔엇던 마을 사람들은 남지에서 오인폭격으로인해 많이 죽거나 실종되어다고한다.
이ㄸ문인지 당시 고아들도많았다고...
밀양에 피난가던와중 청소년수준의 인민군이 귀중한 소를 빼앗으려고하자...육박전을 벌여.. 소를 지켜낸 이야기
(그리고보니 어릴적 할아버지가 집앞에잇는 우물에 자신의 몸통만한 돌을 들엇다고 하면서 힘에도 재능이 잇으셧던듯하다. )
그리고 밀양산인근 주변의동굴에 피난으로 고생했었다라는 이야기
그리고 복구이후 지역유지인덕에 미군물자를 얻어와서 집을 지을수잇엇고 당시 나름 자랑이엿다라는 이야기
그리고 전후 소학교가 너무멀자... 집앞의 논밭을 기부해서 공립초등학교를 유치한이야기 그게 자랑이엿던 삼촌과 이모들의이야기
(나중에 폐교가되고 이를 당시교육청에서 기업에 파는 과정속에 친척들의 반대와항의가 심햇엇다. )
그리고 조합관련해서 . 보증 비슷한걸로... 책임을 지다가. 인해서 가산을 탕진했엇다라는 이야기
당시 외할아버지 추천으로 공무워이나 조합 취업한 마을 청년과 달리
경제적이유로 삼촌들은 사범고등학교 진학을 못하고.....
이게 외할아버지의 한으로 남앗엇다라는것...외할아버지는 외삼촌들을 교육자로 만들고싶어햇엇다라고한다.
큰이모들은 할아버지가 당시시대 유학인덕에 공부해봐야 소학교 라고해서 불만이 많으셧엇고...
6.25이후 정부시책과 변화된 할아버지인식덕에 이모들도 교육을제대로 보내려고했으나 경제적형편으로 이모들으 소학교 공부박에 못했엇고 ... 막내 .이모들은 가출?!;;이라하고 서울로상경하게된다.
소위 공순이,식모살이로 많이 힘들어햇엇던듯....서울 이모들은 그이야기사실 잘안하려고하고 그이야기하면 울려고하신다.
이형편에 나름 성적으로 마을 상위권?!이였던 유일하게 중학교 진학한 어머니는 공부에 뜻이 없엇다고....
이모도 삼촌도 어머니 본인도 공부를 좋아한타입도아니엿엇다고한다;; 뭐 그렇게 미련을 두지않으신듯.
그외에는 마을에 그러니깐 어머니의 외가?! 쪽이 일제시절 징용,돈벌이 등으로 건너가서
해방후 외교단절로 왕래소식이 끊긴사람이 많앗는데..
박정희정부시절 조총련 와해및 한국정부 경제개발 홍보목적으로한 재일교포 /조총련계 왕래 사업으로
어미니 외가 친척들이 처음으로 방문하게되었고 친척이 준 귤을 먹엇엇다라는 이야기도있음
해방직전까지 외할아버지와 어머니 와가댁과 외할머니를 대신해 할아버지가 보낸 편지 왕래가 있엇다라는것을 보아...
서진으로나마 살갑게지내셧던듯;;그렇게 박저희정부시절 정상화되고... 외할머니 덜아가신 그이후에도 당분간 서신은 계속되셧다고한다.
그외에는
다른마을의 집들은 물뜨러간다고 힘들엇엇는데 우물덕에 편했었다고
당시에는 산이 벌거숭이라....
그리고 나무하러가려면 멀리 가야해서 몇리를 걸어야햇다고... 소여물먹이는것도그렇고....세상이 좋아졋다고 이야기하심...
소꼴못베는건.... 비료 /인문섞기위해서 모앗다고;;
그래서...산에 나무를 벨정도로....가야하는 벌초 ;;;같이 이정도 벌초를 할정도엿다라는것...
을 외삼촌과같이 벌초같이하다 ㅡㄹ은적이잇음..
그외에도 정부시 책상 송충이를 잡으면 미국지원밀가루 같은걸를 주엇다다라는 기억이나..
그리고 지금은 비닐하우스 단지가 되어버린곳에 개간해보린 벌?1 늪이잇는데 우포늪보다 배로컸엇다고한다.
그리고 이당시 낙동강 수재가 커서..개간하기전엔홍수피해도 잦앗다고;;; 이주면엔 물과관련하지명이 매우많다.
그당시 외삼촌들이 가서 자주 갔엇던듯..날이가물어지면 대나무로이용한 삿갓같은 기구로 물고기나 가물치ㄴ를 많이잡앗엇다고...
외가댁에가면이해가함..
지금으로 봐서는 자연 파괴지만 그 시대상으로는 개간해서 밥을 먹엇고 자연피해도막았었엇다고 자주이야기하심.
지금의잣대로 그때의 잣대에 의한행동을 다 재조명하기엔 이해심이 부족하다고....
대부분 내가 어릴적/ 그이전 돌아가셧기때문일것...다만 친척과 부모님에게들은 기억으로 정리해본다.
2. 친가와 외가는 모두 창녕이다.
친가는 마산 진동에 잇다가 - 고조할아버지때 창녕으로 왓엇다고한다.대한제국-일제시대
...이지역엔 아버지 성씨가 적지만 상당수 잇다...그래서 온게 아닌가싶다.
나의 친 할아버지는 일제시대 태어나 6.25전쟁?!/625종료?! 아무튼 군으로 임관을 한이후 할머니와함께 군에서 생활하시다.
내려보내려다 제대를 1달 앞두고 갑작스레 고열로인해 사망을 하셧다.
아마 임관이후엔 임광으로 저장한돈으로 고향으로내려가 집안을 일크키려고햇엇던게 아닌시가싶다.
당시 군에갈정도면 나름 운도 좋은 편이였이라라 생각된다.
1달만에 고열로인한 사망햇다고한 병적기록부가 제적등본에 잇는것,,.할아버지가 근무해 있엇던 곳을 보면;;
아마 한탄병이라 불리우는 유행성출열혈에 사망하신게 아닌가싶다.
당시에는 현충원이 존재하지않았고,,,,,지금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현재 현충원에 게신다.
증조할머니와 할머니가 계셧던 그ㄸ;;; 가장이 없으니 급격히 기울어졌고....유공자 제대로 혜택도못받으셧던듯...
할머니는 아버지가 중학교시절 고생하시다 병으로 사망하셧고. ....
할머니께서 아프시자...병원비조라 얼마 가지고잇던 논밭 을 파는 와중에 아버지의 외가쪽에 금전 사기를 당햇엇다라고한다.
추가로 나중에밝혀진이야기지만 할아버지논밭을 부치던 소작인 친척이 밭을 경영하면서 모른척해서...
나ㅈ조상땅찾기해서 밝혀진 사실이지만... 몇십년동안 세금을 낸덕에.. 그 소작인에게 결국 넘어가버렷다.
아버지는 50대 이후에서야 군유공자 혜택을 받을수있다라는것을 아셧고..
어릴적 군유공자대우를 못받앗던것에대해 아쉬워하셨다.
어릴적..움막과 비슷한집에서 흙집에서 살았다라는것을 회고하신것을 보아.. 무척이나 힘들엇엇던듯
할머니가 돌아가신 나중엔 증조할머니 와 할아버지의 여동생, 아버지의 고모댁에 살게되는데...
아버지의 고모는 당시 사별후 재혼을 햇엇던지라...눈치밥이 나름있으셧던듯
그럼에도 나름 취업이후에 돈도 지워내드리고 돼지도 사라고 넣어드리고....
할아버지에게로 받은 논밭도 얼마 부치게햇엇으나....소작도 제대로안주고해서해서 스트레스가심하셧엇듯...
나중에 또 이쪽 분과;;;; 돈에대해 송사가 끝이지않앗던터라....거의 교류가귾어짐....
그와중에 상경계열당시 공업고에 진학 이후 나름 나가던 지역대기업에취업하서 나름 자부심이강하셧다.
해당 대기업이 대거 imf덕에 실직하게 되셧고..고집이 유독강하지신것을 보아...힘들어하셧던듯;;
친가쪽은 할아버지가 아버지가아직 태어나기전 일찍돌아가신데다.
할아버지의 형제도 실종된상태고.. 민주쪽으로 징용으로 끌려간 기록이잇다.
그외엔 고조할아버지 형제 가족대인데....사실상 남남인지라;;
기껏 유공자혜택신청서류를 하려던차에....아버지가 신청한지 2년이지나고 아버지가돌아가신 3개월이후에
유공자혜택이 가능함과 할아버지할머니 현충원 이장이 가능하다라는 서류가 날라와서..
끝까지 유공자혜택을 받지못하셨던 아버지가...안타까웟음;;;
어미니가 결혼후 증조할머니를 몇년간 모시고사셧는데....음...시집살이가 고되엇다라는 야야기가 있었고;;
내가 태어나기전 돌아가셨던듯...
이런저런 형편덕에... 친가쪽 친적도수도적고...교류하는 친가 친척이 전무함
아버지도 어릴적이 힘드셔서 그러가;; 이야기를 잘 안해주셧고....
증보할머니 고모할머니에게 어머니가 들은 이야기나 어쩌다가 아버지 가끔하신 이야기 ,
벌초 성묘하다 혹은 인사치레 만나는 고모할머니에게 수분 이야기를 종합해봄
3. 외할아버지 외가집은 창녕 기반의 성씨중 하나로.. 전통적인 농촌의.성씨 중심 촌락의 장손이였음.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동네 슈퍼마켓을 운영하시며. 유독 반공을 강조하셧던기억이다.
내가 4살때까지는...기억 하지만 5살때 돌아가셧다../
이모/외삼촌 어머니 에게 들어본 외할아버지는
어릴적 서당을 가셧고 나름 한학에 자부심이 강하셨던모양이다.
외할아버지의 청년기는 잘모르나 결혼후 큰이모님을 남겨두고...일제시절 징용으로끌려가서..
성씨촌락의 대표로 끌려갔엇다라는것...징용당시 입대선서같은거에 장같은것일 해야햇엇다고한다.
남방으로가셔서 먹을것이 없어서 땅에서 고구마 마 같은것을 캐먹으면서 고생하셧엇다라는것
고생하면서 바나나를 그때 처음으로 먹엇어는데 씨가많앗더라라는것...그게 바나나라는것도 80년대들어서야 아셧다고;;
해방이후에도 지역위원에 참여해서 창녕군을 만드는 기초 분위에서 활동 하셧다는것
(이로 인해인지 1970대까지 지역정치인들에게 편지왕래도 많이 왓엇다고 한다. )
6.25 피난당시 마을에 남지 혹은 밀양으로 피난가는 두부류가잇었는데....
외할아버지네가족들은 밀양으로 가는 바람에 사망을 면할수잇엇다는것...
남지로피난갔엇던 마을 사람들은 남지에서 오인폭격으로인해 많이 죽거나 실종되어다고한다.
이ㄸ문인지 당시 고아들도많았다고...
밀양에 피난가던와중 청소년수준의 인민군이 귀중한 소를 빼앗으려고하자...육박전을 벌여.. 소를 지켜낸 이야기
(그리고보니 어릴적 할아버지가 집앞에잇는 우물에 자신의 몸통만한 돌을 들엇다고 하면서 힘에도 재능이 잇으셧던듯하다. )
그리고 밀양산인근 주변의동굴에 피난으로 고생했었다라는 이야기
그리고 복구이후 지역유지인덕에 미군물자를 얻어와서 집을 지을수잇엇고 당시 나름 자랑이엿다라는 이야기
그리고 전후 소학교가 너무멀자... 집앞의 논밭을 기부해서 공립초등학교를 유치한이야기 그게 자랑이엿던 삼촌과 이모들의이야기
(나중에 폐교가되고 이를 당시교육청에서 기업에 파는 과정속에 친척들의 반대와항의가 심햇엇다. )
그리고 조합관련해서 . 보증 비슷한걸로... 책임을 지다가. 인해서 가산을 탕진했엇다라는 이야기
당시 외할아버지 추천으로 공무워이나 조합 취업한 마을 청년과 달리
경제적이유로 삼촌들은 사범고등학교 진학을 못하고.....
이게 외할아버지의 한으로 남앗엇다라는것...외할아버지는 외삼촌들을 교육자로 만들고싶어햇엇다라고한다.
큰이모들은 할아버지가 당시시대 유학인덕에 공부해봐야 소학교 라고해서 불만이 많으셧엇고...
6.25이후 정부시책과 변화된 할아버지인식덕에 이모들도 교육을제대로 보내려고했으나 경제적형편으로 이모들으 소학교 공부박에 못했엇고 ... 막내 .이모들은 가출?!;;이라하고 서울로상경하게된다.
소위 공순이,식모살이로 많이 힘들어햇엇던듯....서울 이모들은 그이야기사실 잘안하려고하고 그이야기하면 울려고하신다.
이형편에 나름 성적으로 마을 상위권?!이였던 유일하게 중학교 진학한 어머니는 공부에 뜻이 없엇다고....
이모도 삼촌도 어머니 본인도 공부를 좋아한타입도아니엿엇다고한다;; 뭐 그렇게 미련을 두지않으신듯.
그외에는 마을에 그러니깐 어머니의 외가?! 쪽이 일제시절 징용,돈벌이 등으로 건너가서
해방후 외교단절로 왕래소식이 끊긴사람이 많앗는데..
박정희정부시절 조총련 와해및 한국정부 경제개발 홍보목적으로한 재일교포 /조총련계 왕래 사업으로
어미니 외가 친척들이 처음으로 방문하게되었고 친척이 준 귤을 먹엇엇다라는 이야기도있음
해방직전까지 외할아버지와 어머니 와가댁과 외할머니를 대신해 할아버지가 보낸 편지 왕래가 있엇다라는것을 보아...
서진으로나마 살갑게지내셧던듯;;그렇게 박저희정부시절 정상화되고... 외할머니 덜아가신 그이후에도 당분간 서신은 계속되셧다고한다.
그외에는
다른마을의 집들은 물뜨러간다고 힘들엇엇는데 우물덕에 편했었다고
당시에는 산이 벌거숭이라....
그리고 나무하러가려면 멀리 가야해서 몇리를 걸어야햇다고... 소여물먹이는것도그렇고....세상이 좋아졋다고 이야기하심...
소꼴못베는건.... 비료 /인문섞기위해서 모앗다고;;
그래서...산에 나무를 벨정도로....가야하는 벌초 ;;;같이 이정도 벌초를 할정도엿다라는것...
을 외삼촌과같이 벌초같이하다 ㅡㄹ은적이잇음..
그외에도 정부시 책상 송충이를 잡으면 미국지원밀가루 같은걸를 주엇다다라는 기억이나..
그리고 지금은 비닐하우스 단지가 되어버린곳에 개간해보린 벌?1 늪이잇는데 우포늪보다 배로컸엇다고한다.
그리고 이당시 낙동강 수재가 커서..개간하기전엔홍수피해도 잦앗다고;;; 이주면엔 물과관련하지명이 매우많다.
그당시 외삼촌들이 가서 자주 갔엇던듯..날이가물어지면 대나무로이용한 삿갓같은 기구로 물고기나 가물치ㄴ를 많이잡앗엇다고...
외가댁에가면이해가함..
지금으로 봐서는 자연 파괴지만 그 시대상으로는 개간해서 밥을 먹엇고 자연피해도막았었엇다고 자주이야기하심.
지금의잣대로 그때의 잣대에 의한행동을 다 재조명하기엔 이해심이 부족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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