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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민주화 투쟁이라고 여겼지만, 사실은 공산주의 운동이었다"

1982년 대구지법에서 부산지역 의식화 학습 사건인 ‘부림(釜林)사건’ 2차 기소자 3명에 대한 1심 재판이 열렸다. 재판장은 서석구(70) 변호사. 당시 서 재판장은 피고인이던 이호철씨에게 징역 1년을, 정모·설모씨에겐 각각 집행유예와 선고유예를 선고했다. 주된 혐의이던 국가보안법 위반을 무죄로 판단하고, 계엄법 위반 혐의 등만 유죄로 인정한 결과였다. 검찰이 이씨에게 징역 10년, 정씨·설씨에게 징역 5년을 구형(求刑)했던 걸 감안하면 상당히 가벼운 형량이었다. 이호철씨는 나중에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민정비서관을 지낸 인물이다.

부림사건은 1981년 부산지역 학생·교사·회사원 등 22명이 ‘이적표현물 학습과 반국가단체 찬양 및 고무죄’로 구속된 사건이다. 그 점에서 당시 이 판결은 파격에 가까웠다. 서 변호사는 이 사건 재판 이후 부산지법을 거쳐 진주지원으로 옮겼다. 그는 “정상적인 인사발령”이라고 했지만, 당시 언론에선 “부림사건 국보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해 좌천됐다”는 말이 나왔다.

그는 1983년 대구에서 변호사로 개업한 뒤 10여년간 대구·경북 지역 운동권 인사들의 변론을 도맡았다. 그는 “당시 나는 좌편향돼 있었다”고 했다. 부림사건 국보법 위반 부분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것도 “민주화 투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그가 지금은 “당시 판단은 잘못된 것”이라며 “부림사건은 검찰이 기소한대로 공산주의 운동이 맞다”고 말한다. 그는 부림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변호인’에 대해서도 “예술영화가 아닌 정치적인 영화”라고 했다.

영화 ‘변호인’은 정치적인 영화”

그는 1990년대 중반쯤부터 운동권과 결별한 뒤 한미우호증진협의회 한국본부 대표, 대한민국정체성포럼 공동대표를 맡는 등 보수단체 활동을 하고 있다. 한때 좌편향됐던 그는 왜 보수단체 운동의 전면에 나선 것일까. 그에게 부림 사건 얘기부터 물었다.

―당시 부림사건 국보법 위반 부분에 대해 왜 무죄를 선고했나?
“판결 당시만 해도 나는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이미 읽고 상당 부분 공감했을 정도로 좌편향적인 성향이 있었다. 게다가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어서 그 사람들(피고인들)이 본 책들이 다소 과격한 것은 알지만, 민주화 투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죄 판결을 했다.”

―당시 판결은 옳았다고 생각하나?
“아니다. 그때 그 사람들이 의식화 교재로 썼던 책 중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핵심은 반미·친중·친공산월맹이다. 리 교수는 이승만 전 대통령을 민족반역자, 박정희 전 대통령을 배신자, 변절자라고 한 사람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통일을 부르짖었다. 또 박현채 교수가 쓴 ‘한국농업문제의 인식’이라는 책도 의식화 교재로 쓰였는데, 박 교수는 남로당 관련 조직의 세포 총책이었다. 또 부림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김모씨는 1996년 밀입북해서 북한지도원에게 김일성 회고록 감상문을 제출하고, 미전향 장기수 수감 상황과 출소자 생활 실태 등을 보고한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런 점을 종합해보면 검찰의 기소내용이 맞았다고 생각한다.”



―변호사 개업은 왜 했나.
“시민운동을 하고 싶은 욕구도 있었고, 자녀 교육 등 경제적 문제도 작용했다.”

―1983년 개업 이후 시국사범들을 변호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그때만 해도 운동권을 변론해주는 변호사가 거의 없었다. 당시 운동권 대부분은 남한정권은 괴뢰정권, 남한기업은 매판자본이라고 얘기했다. 반면 북한정권은 자주정권이라고 생각했다. 이른바 ‘김일성 주사파’였다. 내가 변론을 그만두면 그들이 더 과격해질 것 같았다. 그들을 설득하고 도와주고 싶었다.”

변호사 개업 후 10여년간 시국사범 변호…
순화가 불가능하다는 것 깨닫고 보수단체 운동 전면에 나서

그는 “한때 대구교도소 접견 시 하루에만 10명이 넘는 시국사범들이 나를 기다렸을 정도로 변론할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다. 그는 시국사범 변론 외에도 1980년대 중반부터 10여년간 대구사회연구소, 낙동강살리기협의회 등 시민단체 활동에도 열을 올렸다. 1987년 ‘6월 항쟁’ 직전에는 전국 변호사회로는 처음으로 대구지방변호사회 소속 변호사들과 함께 시국선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왜 운동권에 등을 돌렸나.
시국사범에 대한 변론이 끝나면 법정 밖에 있는 운동권 인사들이 수고했다고 선물을 주는데, 대부분 북한과 관련된 것이었다. 김일성 주체사상 책자, 북한이 마치 천국인 것처럼 묘사한 루이제 린저의 ‘북한방문기’, 북한 장편소설 ‘두먼강’ 등이었다. 결국 순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운동권 변론을 그만뒀다. 한때 종북세력 편에 서서 그 세력을 강화시켰다는 죄책감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내 판결이 잘못됐다는 자기고백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유민주주의와 북한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변호사로 탈바꿈했다.”

화제를 영화 ‘변호인’으로 돌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림사건 변호를 맡으면서 인권변호사로 변하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 속에서 부림사건은 용공조작으로 묘사된다. 서 변호사는 영화에 등장하는 ‘공안 판사’의 실제 인물이다.

―영화 ‘변호인’은 봤나.
“보지 않았다. 앞으로도 볼 생각이 없다. 주위에서 이야기는 많이 들어 내용은 대강 알고 있다.”

―영화에 대한 생각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라면 사건을 제일 잘 아는 재판부나 검사 측 의견도 들어서 목소리를 같이 전달해줘야 되는데 그 부분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 또 당시 재판장(서 변호사 본인을 지칭)이 변호사로 나선 뒤 운동권과 결별해서 운동권과 대결하는 변호사로 바뀐 것,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언급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실제와 다른 점은?
“영화에선 경찰과 검찰 측에서 방청석을 다 채워 피고인 측은 들어갈 수도 없었다고 돼 있다는데, 그런 적은 없었다. 고문을 했다고 증언한 군의관도 없었다. 판사가 변호사를 방으로 불러 면박을 줬다는 장면도 허구다.”

―피고인들에 대한 고문은 있었나?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 법정에서 고문이 있었다고 주장은 했다. 하지만 내가 목격한 것이 아니라 고문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2009년 부림사건 관련자들이 청구한 재심에서 고문당했다는 주장이 배척됐다는 사실은 있다.”

2009년 법원은 부림사건 일부 관련자들의 계엄법 위반에 대해선 재심을 거쳐 무죄를 선고했으나, 국가보안법 위반 등 주요 혐의에 대해선 유죄 판결을 유지했다. 법원은 지난해 3월 유죄 부분에 대한 재심을 개시해 다음 달 국보법 위반 혐의에 대해 선고할 예정이다.

영화 ‘변호인’은 선거용이고 대선의 연장선에 있는 영화”

―그럼 영화 변호인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
“사실과 허구를 혼합해 노무현 전 대통령과 부림사건 피고인들을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절대 선(善)인 민주투사로 우상화하고, 정권과 사법부, 수사기관을 절대 악(惡)으로 구분한 영화다. 극단적인 이분법적 논리를 극대화한 것이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를 기억하나?
“처음엔 잘 몰랐다. 부림사건 변호인 맡으면서 법정에서 고문당했다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갑자기 인권변호사로 알려지게 됐다. 그렇지만 그때만 해도 김광일 변호사의 유명세에 가려 크게 부각되진 않았다. 나중에 노동운동에 뛰어들면서 운동권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는 부림사건 재판이 끝난 뒤 자신이 살던 아파트 바로 앞 부산 광안리 해변에서 우연히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 요트를 함께 탔다고 했다. 그는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 내게 ‘어떻게 국보법 무죄라는 용기있는 판결을 했는지 놀랐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영화 변호인엔 어떤 의도가 있다고 보나.
“영화 개봉날짜가 12월 19일이다. 그날은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날이고, 문재인 후보가 패배한 날이다. 문재인 의원이 ‘12.19 끝이 시작이다’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영화 ‘변호인’은 순수한 예술 영화라기보단 정치적인 영화라고 생각한다. 선거용이고 대선의 연장선에 있는 영화가 아니냐, 나는 그렇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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